나는 마무리를 못해

  나는 내 스물아홉 꼬박 1년을 제목없는 사이 안에서 그 김어준식 '같기도 연해'에 갇혀 살았었다. 내 복잡한 심경 속의 그는 내게 '고백할 마음이 없거나 고백해본 적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실제로 둘 다 이기도 했다. 가뭄에 콩나듯 이러진 연락과 만남은 그가 대구로 십개월간의 현장발령이 남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나 역시 이유를 묻지도 그렇다고 마무리를 짓지도 않은 체 그냥 잊었다. 한참 후에 그의 장거리 연애는 힘드니 다시 돌아갈 때까지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고 싶다니 무슨 옘병 멘탈 떨어지는 문자가 왔었는데 그 때쯤엔 나도 그냥 무덤덤했다. 그게 한달에 두세번씩 일년을 만나던 사이의 결말이었다. 나도 그도 특별히 누구 탓할 것 없이 똑같이 미숙한 인간이었지만 나는 좋아하고 두려운 마음이 앞서 그랬다는 변명에 숨어왔던거지 뭐. 슬픈 건 그렇게 나쁘고 치사한 행동이라 욕해왔던 그런 태도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준영이에게 돌려주고 있었다는 거. 그래서 뒤늦게 그를 원망하기도 했고. 

거의 2년만에 전화도 아니고 문자도 아니고 카톡! 카톡으로 약 네줄의 메세지가 왔다. 그게 내가 준영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프로필에 올리고 몇 일 후였는데 내가 알려준 적 있는 재주소년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이 났니, 남친이 생겼니 뭐 점 서너개 찍어가며 그러더라고.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계산하고 망설이고 눈치보고 비겁하게 사람을 대하고 살았더니 행복하더냐고. 하지만 덕분에 지금 남자친구의 진가를 알아볼 수도 있게 되었고 진심없는 사람을 보는 눈도 생겼다고. 변명만 백만가지인 나르시즘 갖다 버리고 철 좀 들라고 막 치고 싶었는데 그 일년동안 나는 그 사람과 뭐가 그렇게 달랐던가 싶고 밤이 너무 늦어 만사가 귀찮아 '네. 감기조심하세요-' 이릏게 보냈다.

한참 있다 자기는 잘 못지낸다는 톡이 또 왔는데 그냥 읽고 말았다. 잠이 들면서도 이런 허접한 마무리가 내 한계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했다. 2년 전의 나를 기억해보았다. 나는 너무 괜찮아져버렸다.  좋아해서 불안했는지 불안해서 좋아했는지도 이젠 구분이 안될만큼 멀어졌고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잘못한 건 니가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롯데 월드를 돌아다니다 문득문득 몇 번이나 영상이 생각이 났다. 여길 한 번 오는 게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나는 2년동안 영상이가 크리스마스며 휴가마다 어렵게 롯데월드를 이야기 할 때마다 못들은 척 넘기고, 말을 돌리고, 약속을 어겼었다. 준영이가 처음으로 롯데월드를 이야기한 순간에도 나는 영상이가 생각났다. 니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생각부터 들었다. 영상이는 그 2년동안 내내 스스로를 고치고 바꾸며 나를 이해하려, 내게 맞추려 노력하며 살았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성급하고 의심많은 남자로 몰아가며 자책했고 내게 맞추기 위해 자신도 누구도 아닌 남자가 되어 연기하듯 허둥대고 쩔쩔매며 살았다. 내 지나치는 표정 하나에서 영상이는 수십가지의 자기 잘못을 찾아냈다. 나는 알고도 모른척했다. 내버려두었다. 왜 그랬을까. 왜 아픈 줄 뻔히 알면서 남의 상처는 그렇게 모른척 해 온걸까. 나는 그렇게 롯데월드도, 가로수길도, 이적콘서트도 끝내 그와 함께 가지않았다. 롯데월드 안에서 내내 무거웠던 마음은 그래서였을까. 내가 그의 첫 여자친구였다.

잘했어야 했다. 나같은 처음 때문에 영상이의 다음이 힘들어질까 후회와 자책이 밀려왔다. 사실은 영상이가 옳았다. 배배 꼬인 체 벽을 치고 쿨한 척에 사람을 지치게 하는 내가 아니라 울고 웃고 소리치던 영상이가 맞았다. 나는 이제 너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너는 나 때문에 후회하고 내게 받은 상처 그대로 남에게 돌려주며 불행해질까봐 나는 그 생각에 괴롭고 끝없이 미안하다. 말해줘야 한다. 니가 틀린 게 아니었다고. 니가 했던 사랑이 옳았으니 다음 사람에게 한번만 더 용기를 가지고 너 그대로 부딪혀보라고. 그러면 영상아. 그 때는 너도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텐데. 내가 처음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잘했어야 했는데.

토요일 10시쯤.


- 그랬을 거 같았어. 자기가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도 그 사람이 연락을 안하면, 전화를 안하면 
  전화가 안오는구나... 이러면서 그냥 다 보내버렸을 거 같아. 그렇지?
- 그랬던 거 같아.
- 왜 그랬어?
- 모르겠어.
- 나도 문자 안오고 전화 안오는 거에 섭섭해서 이제 연락을 하지말까 생각도 했는데.
  근데 내가 그러면 정말로 너는 어 이제 안오네...그러면서 그만두고 말 거 같더라.
- ...
- 묻고 싶었어.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잖아. 근데 왜 가만히 있어? 왜 그냥 보내? 
- ...
- 나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는 거 아니야. 그냥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잖아. 궁금해서 그래.
- 그게 잘못된 거라는 건 알아.
- 잘하고 잘못한 게 어딨어.
-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 ...
- ...후회만 했어. 나중에 후회만 오랫동안 했던 거 같아.
- ...울어?
- 아니, 그르니까 뭐 그런 걸 물어. 이건 나중에 생각나면 말할께

그 아침에 내가 그 한마디에 왜 울고 그랬는지 그때도 지금도 알 수 가 없다. 대답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소리없이 모두 꺼져버리고 욱씬거리는 마음만 남은 기분이었다. 내가 왜 지금까지 그렇게 굳은 척 멍하니 사람을 보내버렸는지,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처음으로 마음을 꺼내 달려갔던 그 사람이 내게 어떻게 했는지, 어떤 후회를 얼마나 오랫동안 해야했는지, 내가 왜 이런 여자가 되어버렸는지 억울하고 한심하고 그게 부끄러웠다. 전화를 끊고도 나는 한참을 이불 위에 앉은 체 울었다. 괜찮아 나는 이제는 안그래 그런 생각을 하며 씻어야지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나는데 문자가 왔다. 

[ 웃겨주지는 못할 망정 미안. 
  그리고 그런 모습 싫지 않아.
  우는 거 웃는 거 다 보고 싶어. 
  내가 부족하다는 거 여러모로 느껴 항상.
  많이 좋아한다구. ] 

괜찮아. 정말로 이제 나는 안그래. 서른 하나에 하는 이런 결심 지지리도 늦되고 궁색해. 오직 너에게만은 그러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나는 너 때문에 이제는 정말 좀 더 괜찮은 여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아. 이제 후련해.  


마음, 번지다.

한달 남짓이 되어가지만 마냥 떠다니듯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내 마음이 내 표현과 내 연락이 항상 그에게 부족했다. 밀고 당긴답시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고 나는 한다고 했는데도 그는 어느 순간은 서운했다가 이제는 익숙해졌다며 덤덤하게 굴다가 또 어느 순간은 화를 냈다. 사람들이 여자 친구가 생겨서 좋겠다고 할 때마다 준영이는 '외롭다'고 말했다고 한다.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미숙한 나는 그가 남자 가오는 다 갖다버리고 내 애정과 관심을 바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쩔쩔매며 그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야했다. 나도 서운했다. 몇시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 나를 이해했구나 생각했는데 다음날이면 다시 똑같은 이유로 속상해했다. 준영이는 준영이대로 그랬다. 몇시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 내일이면 달라지겠지 기대했는데 나는 조금도 바뀌지 않더란다. 그렇게 준영이는 조금씩 웃지 않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씩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같이 연극을 보고 밥을 먹는데 준영이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포크만 빙빙 돌리며 말했다.
'알아. 시시콜콜한 이야기 굳이 말 안하는 성격이구나 알고 있어. 문자 몇 통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바쁘면 확인을 못할 수도 있고 일을 집중해서 하다 보면 생각조차 안날수도 있다는 건 나도 알아. 근데 그렇게 아, 바쁜가보다. 아, 피곤한가보다. 그래서 답장이 없고 연락이 없는 걸 아, 그런가보다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넘기면 그게 반나절이 되고 그게 하루가 되고 그게 이틀 삼일이 되잖아. 그렇게 될까봐 겁나는 거야. 나도 혼자 이러지 말고 비슷하게 맞출려고 해봤어. 해봤는데 그럴려면 나는 하루종일 니 생각 한번도 안하고 다 신경끄고 있어야지 가능하더라.'

미안했다. 사실은 그 때 손을 꼭 잡고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게 아니라고 노력하겠다고 말해야 했는데 그런 말이 안나왔다. 오히려 의도하지도 않은 한숨이 새어나와 혼자 흠칫거려야 했다. 이런 날이면 그가 잠들기 전 먼저 전화하지 않은 체 기다린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나는 그냥 밤새도록 앉아 복잡한 생각만 했다. 

발렌타인은 월요일이고 준영이는 연수기간이라 대신 일요일에 만나야했다. 초콜렛이니 선물이니 가방에 넣고 멍하게 지하철을 탄 체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해야 할 말들이 속에서 쏟아져나왔다. 만나기로 한 역은 가까웠고 시간은 코 앞인데 가방에 종이 한 장이 없어 읽고 있던 책의 그림 한장을 찢어서 편지를 썼다. 

'말한 적은 없지만 왜 너를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니 용기가 두근거릴만큼 멋있고 저릿할만큼 고마웠어. 시작은 그랬을지도 몰라. 우리는 서로 너무 달라서 지금은 같은 시간도 다르게 적히고 있지만 나는 너랑 같이 있는 그 시간과 그 공간이 너무 행복해. 나도 앞으로 점점 너같은 사람이 되어 갔으면 좋겠어. 눈물 날만큼 감성짙은 영화 보고싶다고 했을 때 대답 못했는데 지금 나한테는 그런 영화가 너야. 같이 있어서 좋아.'

너덜너덜한 그 책장을 찢고 접어서 건네줬다. 책장을 쭉 찟는 나를 황당한 얼굴로 쳐다봐 뭔가 민망해서 나중에 읽어 집에 갈 때 읽어 그러면서 못보게 했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구름 위로 날아오르는 거 같다는 그의 전화가 울렸다. 내가 답장할 새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문자가 울리고 또 울렸다. 

오늘 아침이, 월요일이 이상하게 가뿐했다. 내내 감기였고 토요일은 밤을 꼬박 새고 눈은 충혈되다 못해 피를 뿜을 거 같은데 이상하게 아침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망설이지 않고 내 마음을 전하면 그 마음을 저렇게 진심으로 받아주고 행복해하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원래 이렇게 뭔가 벅차고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그래.

광화문에서 비빔밥을 먹다가 하얀 장미 꽃다발을 받았고 카드를 받았고 고백을 받았다. '있잖아. 잘하는 게 너무 많잖아. 혼자 전부  다 잘 하잖아. 나는 잘하는 것도 별로 없지만 도움이 안되도 내가 옆에 있으면 안돼?'(준비한 티가 역력했어) 우리 사귀자.' 평소 냉철하고 침착하며 당황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나는 갑자기 혼자 경황이 없어 꽃다발을 들었다 무고한 안개꽃을 다 잡아뜯다가 또 카드를 펼쳤다가 손으로 땀을 닦았다 그러다가 시크하게 딱 한마디 했다. '부끄럽다' 그리고 한 3분쯤 더 그러다 또 한마디 했다 '그래'.  
      
' 근데 너 왜 부케를 사왔냐'
' 아저씨가 추천해줬어'
' 아저씨 센스 참'
' 그럼 이제 손잡고 다녀도 돼?'
' 그럽시다'

하지만 손을 잡고 단 1분 만에
' 야. 근데 우리 높이가 안맞다. 기장 차이가 너무 나. 좀 팔 좀 이렇게 해봐 좀. 아 불편해.'
 
내가 두 손으로 감싸 잡아도 모자랄 만큼 손이 컸다. 얘가 팔이 두근두근거리는 거 같은데 이거 내 소린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김광민 연주회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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